총자산이 457조3050억원에 이르는 삼성그룹의 시작은 어땠을까. 또 주요 계열사만 14개인 CJ그룹의 첫 사업 아이템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은 누구나 아는 글로벌 기업이지만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식료품점, 문구점, DVD 대여점 등을 운영하면서 점차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세계적인 기업들의 출발점을 짚어봤다.
◇삼성 ‘국수’
반도체와 전자기기로 세계적인 기업이 된 삼성. 그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창립자 이병철이 1938년 대구에 삼성상회를 만든 것이 최초의 삼성이다. 삼성상회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삼성의 시작은 상회, 즉 무역업이다. 대구 인근에서 수확한 청과물과 포항에서 들여온 수산물 등을 중국과 만주에 수출했다.
삼성상회. /호암재단 홈페이지
별표국수. /호암재단 홈페이지
위의 로고는 삼성상회가 처음 사용한 로고다. 별 3개와 국수의 재료인 밀이 보인다. 그런데 왜 로고에 국수가 등장했을까. 당시 삼성상회는 무역업 외에도 국수 제조업을 운영했다. 제분기와 제면기를 설치하고 대표 제품 ‘별표 국수’를 출시했다. 당시 별표 국수는 꽤 비쌌지만 대구와 인근 지방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별이 세개 그려진 별표 국수의 상표는 초창기 삼성 로고의 모태가 된다.
별표 국수의 성공 덕분에 삼성상회는 설립 1년 만에 조선양조까지 인수해 양조업에도 손을 뻗었다. 하나의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조미료 제조업, 모직공장 등 다른 사업에도 뛰어들며 영역을 넓혔다. 1969년에는 삼성전자를 설립해 9년만인 1978년, 흑백 텔레비전 200만대를 생산하기도 했다. 이후 삼성은 1982년 반도체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올라서게 됐다.
◇CJ ‘설탕’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분야에서 활약이 두드러지는 CJ그룹. CJ는 식품계열 회사인 ‘제일제당’의 약자다. 식품회사가 뿌리인 것이다. 설탕 제조사를 의미하는 제일제당의 첫 대표 제품은 한국 최초의 백설탕인 ‘백설’이다.
CJ의 시작은 삼성그룹과 떼어놓을 수 없다. 삼성 창립자 이병철이 1953년 8월 한국 전쟁 휴전 직후 부산에 ‘제일 제당 공업’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회사가 CJ의 출발점이다. 당시 한국에는 개발된 국산 설탕이 없어 수입 설탕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제일 제당에서 최초로 국산 설탕 제조에 나섰고, 창립 첫 해 개발에 성공했다. 처음엔 기계에서 설탕 가루가 아닌 검은 액체가 나오는 시행착오도 여러번 겪었지만, 한 용접공의 조언에 따라 사탕수수 원료를 줄였더니 하얀 설탕가루가 나왔다는 숨은 이야기도 있다. 설탕 국산화가 이루어지면서 설탕 수입량도 현저히 줄어들고 외화 절감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제일 제당 공업 회사 모습.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1950년대 설탕 포장 작업 모습. /CJ제일제당
1950년대 설탕 제품. /CJ제일제당
CJ제일제당 광고화면. /CJ제일제당
이후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는 장손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에게 제일제당을 넘겨줬다. 이재현 CJ 회장은 1993년 삼성에서 정식 계열 분리한 뒤 1996년 제일제당 그룹을 출범했다. 이어 바이오·생명공학 분야, 영화사업본부 등을 설치하면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그룹 내 CJ제일제당은 지금도 국내 식품업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넷플릭스 ‘DVD 대여업체’
전 세계 구독자수 2억명, 세계 최대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Netflix). 1997년 설립된 넷플릭스의 초기 모습은 ‘DVD 대여업체’였다. 창업주 리드 헤이스팅스와 마크 랜돌프 손에서 시작됐다. ‘인터넷(net)’과 ‘영화(flicks)’를 합쳐 이름 지은 만큼 이들이 얼마나 인터넷 영화 유통 서비스를 염원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DVD 대여업체를 운영했던 넷플릭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DVD 대여업체를 운영했던 넷플릭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두 창업자는 당시 126억달러(약 14조5845억원) 규모였던 ‘비디오 시장’에 주목했다. 하지만 비디오 대여 체인업체 ‘블록버스터’가 시장을 독식하고 있어 사업을 시작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DVD’라는 새로운 매체가 나왔다. 비디오보다 작고 가벼워서 전자상거래 방식으로 대여업 운영이 가능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해 매달 구독료 20달러(약 2만3150원)를 내면 원하는 영화를 최대 3개까지 DVD에 담아 집으로 보내줬다. 고객은 연체료 걱정 없이 무제한 감상하다가 반송 봉투에 넣어 우체통에 반납하기만 하면 됐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대여 서비스였다.
넷플릭스는 구독형 DVD 대여 서비스를 통해 2004년까지 가입자 190만명을 끌어모았다. 이후 유튜브가 등장하면서 두 창업자는 2007년 온라인 스트리밍 기능을 도입했다. 2011년에는 우편으로 DVD를 배송하는 사업모델을 완전히 접고 지금의 넷플릭스를 선보였다.
◇티파니앤코 ‘문구점’
세계적인 명품 주얼리 브랜드 티파니앤코(Tiffany&Co.). ‘티파니 드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값비싼 보석을 취급하는 브랜드다. 그런데 티파니의 시작은 보석과 전혀 관련없는 ‘문구점’이었다. 창립자 찰스 루이스 티파니와 존 버넷 영은 1837년 뉴욕 브로드웨이에 ‘티파니 앤 영’이라는 작은 문구 및 팬시용품 판매점을 열었다.
처음엔 아시아 국가에서 수입한 골동품을 판매했다. 이후 유리, 도자기, 시계, 은 제품 등 다양한 제품을 내놓으면서 뉴욕 신흥 부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보석을 취급하게 된 것은 가게를 오픈한지 2년째부터다. 프랑스에서 보석을 수입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때 티파니는 주문 카탈로그 ‘블루 북(Blue book)’을 발행했는데, 이는 미국 내 최초의 카탈로그이기도 하다. 1851년에는 실력 있는 뉴욕의 은 세공자를 영입해 본격적으로 주얼리 사업에 돌입했다.
티파니앤코 초기 모습. /티파니앤코 홈페이지
티파니앤코 제품. /티파니앤코 홈페이지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속 한 장면. /티파니앤코 홈페이지
찰스 루이스 티파니는 1853년 공동 경영자였던 존 버넷 영에게 경영권을 사들이고 회사 이름을 지금의 상호인 '티파니 앤 코'로 변경했다. 티파니가 이름을 알린 건 1960년대부터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향이 컸다. 제목에 브랜드 이름을 넣은 최초의 PPL 사례인 셈이다. 오드리 헵번이 신분 상승을 꿈꾸며 티파니 쇼윈도를 바라보는 모습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 영화를 통해 티파니는 고급 주얼리 브랜드로 각인됐다.
'[주식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식수익률] 9/7일 메리츠금융지주 수익률 156.87% (0) | 2021.09.07 |
---|---|
[주식수익률] 9/6일 메리츠금융지주 수익률 143.92% (0) | 2021.09.06 |
외인 몰리며 반도체·IT 기지개…코스피 부활 신호탄될까 (0) | 2021.09.06 |
“삼성·美테일러시 8일 협상 테이블 앉는다” (0) | 2021.09.06 |
시스템반도체 호재 만발에도…'지지부진' 삼성전자 주가 왜? (0) | 2021.09.04 |
댓글